잡담 26

아침에도 지지 못하는 달

아침에도 지지 못하는 달 희미하게 창백해진 반쪽달이 오도 가도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며 아침인데도 서쪽 하늘가를 서성거린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 떠나지 못하는 걸까 한때는 세상을 밝히는 유아독존이었는데 그때는 무수한 별빛도 고개를 숙였고 미소 띤 얼굴은 모두의 추억이었는데 이제는 존재의 의미조차 빛바래고 있구나 온통 남을 위해 산 것만도 아니었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산 것만도 아니었는데 뒤돌아 볼 새도 없이 앞만 보고 살다 보니 그저 살기만 위해 산 것처럼 회한만 남았다 나이를 더해가도 마음은 늘 제자리 순간처럼 지나간 세월은 흔적도 없지만 한걸음 더 내딛고 싶어 큰 숨 들이쉬고 내뱉을 숨이 남아 아직 그 자리 서성인다 짓눌리고 일그러져 납덩이처럼 피리 할지라도 담아두었던 어제의 기억은 오늘도 또렷하다..

잡담 2024.10.15

그리운 날에는

그리운 날에는 눈이 시리도록 창백한 하늘가에 문득 그려지는 그 얼굴은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그리움일까 뭉게뭉게 솟아 난 기억들이 쪽빛으로 눈부시게 하늘가에 물들면 그리운 얼굴은 가슴에 다시 묻자 가느다란 잔상이 희미해질까 안개처럼 흩어져 다시 담지 못할까 고요한 심연에 회한의 파문이 인다. 점점 작아지는 상념의 끝자락에 슬프도록 찬란한 푸르름이 흩트러진다. 그저 그리운 것이 그리운 날에는 buljeong 2024.08.16

잡담 2024.08.16

당연한 것이 서럽다

당연한 것이 서럽다 아침에 지는 달은 당연한 것인데도 저렇게 가슴이 구멍 난 듯 보이는 것은 벌써 나이 든 서러움 때문인가?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침과 저녁이 조금 늦게 오거나 조금 빨리 온 적도 없건만 오늘따라 그냥 그렇게 서럽다. 계절 따라 어김없이 한숨이 늘어가고 더하고 더한 흔적들이 빼곡히 남았는데 뭔가 빠진 듯 또 채우고 움켜쥐려 발버둥 친다. 만남은 늘 그럴 것이라 짐작하고 헤짐은 언제나 갑작스럽고 화가 난다 잠시 머뭄이 영원할 줄 아직도 착각하며 오면 가고 가면 또 오는 것인데 당연한 것들은 늘 오고 가는 것인데 왜 오는 것보다 가는 것이 많은 걸까 잃는 것이 많아지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짜 맞춘 듯 시간표는 하루하루를 더하는데 나만은 늘 예외이고 아니라고 믿고 싶은 걸까 이치를 깨달을 만큼..

잡담 2024.07.26

한낮에

한낮에 찌르는 듯 내리 쏟는 햇살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창처럼 내리 꽂힌다. 열광(烈光)이 지나는 곳마다 외마디 비명이 인다. 비둘기는 축 처진 날개를 질질 끌고 참새들은 연신 분수대에 텀벙댄다. 바람결조차 한숨 쉬듯 사라지면 숨 멎듯 다급한 부채질에 성급한 발걸음 징징대고 종종 댄다. 뱀처럼 담장을 휘감은 장미는 불볕 섞인 빨간 미소를 머금었고 가지마다 축 처진 잎새 사이로 알알이 여무는 열매들은 터질 듯 팽팽히 부풀었다. 푹푹 찌는 열기 속에 낭만도 숨죽인 듯 시들하고. 세상은 멈춘 듯 느려진다. 한 낮은 그을린 살갓을 터트리 듯 그렇게 울부짖으며 이글이글 다가선다. buljeong 2024.07.20

잡담 2024.07.25

눈꽃 핀 아침

눈꽃 핀 아침 간밤에 진눈깨비 질척이더니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피었다. 소복소복 하얀 눈꽃송이가 꽃송이처럼 몽실몽실 피어났다. 등성 듬성 잎을 단 연산홍 가지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었고 붉은 잎 촘촘한 회양목 무리에는 뽁뽁이를 펼친 듯 올망졸망 폭신하다. 기세등등한 대추나무 큰 줄기에는 근육질의 하얀 힘줄 도드라지고 새순 얼까 헌 잎 단 단풍나무는 벌벌 떨며 그나마 몇 잎 떨군다. 잎이 무거워진 남천의 열매 달린 가지는 아래로 아래로 휠만큼 휘었고 날개 달린 화살나무 가지에는 날아가지 못하게 꽉 달라붙었다. 버섯처럼 봉긋 솟은 반송에는 수국이 돌려난 듯 풍선처럼 부풀었고 키 큰 소나무 붉은 줄기 따라 하얀 거품이 하늘하늘 흘러내린다. 아직도 꽃받침이 남아 있는 꽃댕강나무는 금세라도 댕강댕강 부러질 것..

잡담 2024.02.08

겨울 단상(2024)

겨울 단상(2024) 매양 겨울이면 추웠다지만 밀려 내려온 제트기류가 눈비 번갈아 휘날린 올해는 유난히 더 춥다. 칼바람 춤추는 공원길을 따라 웅크린 연탄들이 줄지어 허둥대고, 빌딩숲 이어진 큰 길가에는 바둑돌들이 삼삼오오 서성인다. 키 큰 가로수들이 웅웅 울어대는 공덕오거리 갈래길마다 불빛 번쩍이며 덜컹대는 네모통들이 줄지어 빵빵댄다. 그렇게 겨울의 하루는 저마다 종종 대는 시간을 따라 해넘이 잔상처럼 어른대며 바람 속으로 떠난다. 또 한 겨울을 더하지만 올겨울이 더 춥기만 한 것은 잊혀진 어제처럼 오늘이 또 그렇게 쌓여가기 때문일 게다. buljeong 2024.01.25

잡담 2024.01.30

아침에 지는 달!

아침에 지는 달! 밤새 하늘과 세상을 밝힌 달이 지고 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삼라만상은 전적으로 달에게 의지했었다. 어두웠던 하늘이 서서히 붉어지며 둥근 얼굴은 점점 핼쑥해졌다. 밤새 빛나던 별빛도 점점 빛을 잃어가고 하나 둘 더 먼 하늘로 떠난다. 은은한 은빛 속으로 화려한 금빛이 스며드니 집요하게 쫓아오는 붉은빛을 피해 아직 여명이 남아 있는 서쪽 하늘가로 황급히 종종 대며 달음박질친다. 세상의 속삭임이 점점 소음으로 변해 갈 무렵 밤새 지나 온 시간들은 왔던 만큼 뒷걸음질하고 붉은 하늘가로 흩어지는 어둠 속에 그림자처럼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고 있다. 아주 핼쑥해진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듯 은빛 얼굴은 어느새 형체를 잃어가고 급기야 세상은 금빛으로 물들며 일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퇴장하는 늙..

잡담 2023.11.17

여름소리

여름소리 경의선숲길공원은 요즘 소리천국이다. 나무마다 울려 퍼지는 매미들의 찢을듯한 합창은 한 여름을 휘젓는 여름소리이다. 내리 쏱는 오후의 뜨거운 햇살만큼 숙명으로 얽힌 열정이 뜨겁다. 오늘을 위해 컴컴한 시간의 터널에서 기다린 7년의 세월. 그 긴 시간을 지나 주어진 한 달의 삶은 무심코 지나치는 바람 같은 순간. 어디 있을까? 어디에서 기다릴까? 짝 찾는 매미소리는 절규로 이어진다. 그 깊은 아우성은 순간과 순간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진한 소리들은 합창이 되고, 또, 더 큰 울음이 되어 여름 속을 맴돈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절박함을 안고 죽는 순간까지 처절한 여름소리를 쏟아낸다. 가느다란 햇살이 내비친 나뭇가지에 빛바랜 탈피껍질 아래 날개 접고 나뒹구는 매미의 가뿐 숨결 속에 7년의 삶이 또 이어진다..

잡담 2023.07.27

물결의 노래(23.6월)

물결의 노래 앞 물결이 출렁인 자리에 뒷물결이 출렁인다 뒷물결은 앞물결을 따라가고 앞물결은 뒷물결을 끌고 간다 출렁이며 해변에 부딪혀 앞물결이 하얗게 바다로 사라지면 뒷물결은 약속이라도 한 듯 뒷따라 와 앞물결이 그랬듯이 하얗게 바다로 사라진다 크고 작은 물결들이 저마다의 몸짓으로 출렁이며 그렇게 사라진다 더러 크게 출렁이던 빛나는 하얀 큰 물결도 이내 흔적도 없이 바다로 사라졌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작은 물결이나 큰 물결이나 하얀 포말 속으로 큰 한숨을 짓듯 바다로 돌아간다. 지나온 모습이나 앞으로 나아가는 몸짓이나 잠시의 머뭄이나 멈춤도 없이 출렁이며 모두 바다로 되돌아갔고 바람처럼 기억조차 남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물결의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친다 우르르둥탕 츄르르르 2023.03.09. 강..

잡담 2023.03.10

시간의 흔적

시간의 흔적 시간은 늘 흔적을 남긴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이어 삼라만상을 빚어내고 있다. 오래전 사람들이 이 모습을 못 보았듯이 먼 훗날 사람들도 이 모습을 못 보리라. 비와 바람은 늘상 다른 얼굴로 찾아오니 시간 속에 새긴 흔적도 늘 다른 얼굴이어라.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시간은 늘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2019.06.19 장가계에서 buljeong

잡담 2023.01.13